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샤를 8세 (문단 편집) == 생애 == 유년기에는 부왕과 멀리 떨어져서 [[https://en.wikipedia.org/wiki/Ch%C3%A2teau_d%27Amboise|앙부아즈 성]]에 있었고, 즉위할 때 13세의 어린 나이라서 큰누나인 안 드 프랑스가 국정을 대신 다스렸다. 다만 이 섭정기간이 마냥 평화롭진 못했는데 왕실 일원이 섭정을 맡게 되자 중앙집권화를 우려한 프랑스 대귀족들이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 훗날 샤를 8세가 승하하고 나서 [[루이 12세]]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왕좌에 오른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특히 루이 2세는 샤를 8세를 납치하려고 하다가 안에게 적발되어 지엉에 감금되었다 탈출하는 등의 소란이 있었다.] 이 반란은 1485년부터 1488년까지 3년간 이어졌는데 이 내전을 광기 전쟁이라고 한다. 광기 전쟁 종전 후 4년 뒤인 1492년부터 친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이탈리아에 대한 관심이 생겨 2년 후인 1494년에 '''[[이탈리아 전쟁#s-3.1.1|제1차 이탈리아 전쟁]]을 개시했으며''', [[피렌체]]를 점령했다. 그후 샤를 8세는 25,000명의 군대를[* 이들 중 8,000명은 [[스위스 용병]]이었다.] 이끌고 [[나폴리 왕국]]으로 향했다. [[나폴리]] 외곽의 몽 산 조반니 요새는 수백년 동안 수많은 공격을 받았지만, 단 한 번도 침략을 허락하지 않았던 요새였다. [[프랑스군]]은 성벽에서 90m 되는 거리에 대포를 설치한 후 45kg의 포탄을 쏘아댔다. 8시간 동안 포탄은 쉼 없이 성벽을 두들겼고, 성벽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샤를 8세는 나폴리에 무혈로 입성했으며, 스스로 나폴리 왕위에 즉위했다(1495. 2). 이런 프랑스의 공세에 위기를 느낀 [[베네치아 공화국]]을 중심으로 [[교황]] [[알렉산데르 6세]] 등이 힘을 모아 반 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샤를 8세는 격파하려 했으나 동맹군이 포르노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함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이탈리아 반도]]를 모두 차지하겠다는 생각을 단념하게 되었다.[* 사실 샤를 8세는 포르노보 전투에서 1만의 병력으로 2배나 되는 동맹군 2만을 격파하는 대승을 겨두었지만 그가 전쟁에 워낙 돈을 많이 쓰는 바람에 국가 부채가 많이 증가하여 재정난이 심각해졌다. 그래서 샤를 8세는 약탈로 메우려했지만 그래도 모자랐으며 이 약탈로 인해 이탈리아인들의 분노를 크게 샀다. 게다가 장기간의 원정과 보급의 문제로 보급을 제대로 못하여 식량까지 부족해지자 더는 전쟁을 할수가 없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이탈리아에서 철수하면서 그의 군대가 [[매독]]을 프랑스로 전파시켰다. 왜냐하면 이때 프랑스 군대가 나폴리를 점령했을 때, 프랑스 병사들이 나폴리의 [[사창가]]에 들러서 [[매춘부]]들과 방탕하게 놀아나는 바람에 매춘부들이 갖고 있었던 매독이 병사들한테 옮았고, 그 매독에 감염된 병사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프랑스 여자들과 [[성관계]]를 벌일 때 매독을 옮겼기 때문이었다. 1498년 왕비 [[안 드 브르타뉴]]와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낳았지만 모두 요절했고, 본인마저 상속자없이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죽은 사인이 상당히 어이없는데 고향인 앙부아즈에서 [[테니스]] 경기를 보러가다가 문의 상인방[* 문의 위쪽 틀을 이루는 기둥.]에 머리를 부딪힌 것이었다. 처음엔 멀쩡했으나 두세 시간 뒤 현기증을 호소하다가 쓰러졌는데 의사의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뇌졸중]]이 원인으로 보인다. 시신은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지만 심장만은 부모님이 안장되어 있는 클레리 노트르담 성당에 묻혔다. 왕위는 샤를 8세의 고조부 [[샤를 5세]]의 아들 루이 드 발루아의 손자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2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물론 이는 《[[살리카법]]》에 의한 것으로 가장 가까운 왕위 계승자였던 샤를 8세의 누나 잔 드 프랑스의 남편이 바로 루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루이 12세]]는 즉위 후 잔과 이혼하고[* 이혼이 성사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잔이 불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루이 12세와 잔이 결혼한 이유도 [[루이 11세]]가 잔이 불임인 것을 알고 왕위 계승전에서 본인의 가문에게 조금 껄끄러웠던 [[루이 12세]] 가문의 후계를 끊기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매형 샤를 8세의 왕비였던 [[안 드 브르타뉴]]와 재혼해서 두 딸 클로드와 르네를 낳았다. 발루아 왕조의 직계는 이렇게 샤를 8세에서 끊겼고, 이후에는 방계 왕조라 봐도 무방하다. 재미있게도 같은 왕조 내인 샤를 8세와 루이 12세의 아버지대 촌수관계가 [[카페 왕조]]의 마지막 왕인 [[샤를 4세]]와 발루아 왕조의 초대 왕인 [[필리프 6세]]의 촌수관계보다 더 멀다. 샤를 4세와 필리프 6세는 [[사촌]]지간이었지만 샤를 8세와 루이 12세는 [[칠촌]]지간이었다. 즉, 전자에 비하면 거의 남이나 다를 바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